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서 대분열 (문단 편집) == 1054년, 상호파문 사건의 전말 ==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다.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 기간 중 내내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뭐라고 하건 말건 처음부터 끝까지 교황의 수위권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양자 간 합의는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이들을 추방했고,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교황 사절단은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세계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세계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에서 지워버렸다... '''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일방적인 수위권 주장과 추방까지는 맞지만, 양측이 서로의 교회 자체를 파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절단을 보낸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했고, 후임 교황 [[빅토르 2세]](재임 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1054년 7월에 교황좌는 공석'''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레오 9세의 대리자로 파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파문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올려 놓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끝끝내 몰랐지만 '''자격이 소멸된 상태'''였고[* 서울 가톨릭대 신학과에선 이를 두고 '''"의도치 않은 월권''''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직접 파문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훔베르투스 추기경과 그 사절단이었다. 혹은 일부 주장처럼 교황을 직접 파문했다고 하더라도 레오 9세는 이미 죽었고 빅토르 2세는 착좌하지도 않았던 상태였다. 결국 오늘날 동서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자체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적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교황과 세계 총대주교의 상호 파문 자체는 이미 500여 년 전 아카키오스 분열 때도, 200여 년 전 포티오스 분열 때도 있었던 일이다. 곧, 1054년의 사건은 아무리 중대하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전에도 있었던 분열의 반복일 뿐이었다. 전에도 그러했듯이 잠깐의 다툼으로 그치고 다시 서로 화해했다면, 1054년의 사건은 아카키오스 분열이나 포티오스 분열처럼 그냥 교회정치적 해프닝으로만 비추어졌을 것이다. 다시 서로 화해하기만 했다면 말이다. 요컨대, 이 분열을 대(大)분열로 만든 건 1054년의 상황이 아니다. 1054년의 분열에서 화해를 하지 않고 수백년을 보낸 것이야말로 이 분열을 대(大)분열로 만든 것이다. 다소 일상적인 비유를 하자면, '''친구끼리 절교를 할 때는 꼭 무슨 거창하고 살벌한 다툼이 있는 건 아니다. 설령 해프닝에 가까운 다툼이라도, 이후에 서로 화해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버리면 그게 바로 절교가 되는 것이다. 1054년 이후 동서 교회가 소원해진 게 바로 이런 모양새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